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[스크랩] 박목월 자작시 해설 - 보랏빛 소묘 중에서

by 마루 박재성 2016. 10. 28.

박목월 시인의 <나그네> 자작시 해설

 




 나그네

                     박목월



江나루 건너서

밀밭 길을


길은 외줄기

南道 三百里


술 익는 마을마다

타는 저녁놀


구름에 달 가듯이

가는 나그네.

              

                           나그네. <靑鹿集>


<나그네>는 청록집에 수록한 내 작품들의 가장 바탕이 되는세계다.

그 지음, 나는 <강나루 건너서 밀밭>과 <술 익는 강마을>과 <길은 외줄기 南道 三百里>의,

그 향토적이며 한국적인 정서가 어린 풍경을 묵화적(墨畵的) 고담(枯淡)한 필치로 표현하려고, 애를 썼으며, 묵화에서 점 하나를 소중이 하듯 말 하나를 아꼈다.


<나그네>의 주제적인 것은 <구름에 달 가듯이 가는 나그네>였다. 그야말로 혈혈단신 떠도는 나그네를 나는 억압된 조국의 하늘 아래서 우리 민족의 총체적인 얼의 상징으로 느꼈으리라. 나그네의 깊은 고독과 애수. 혹은 나그네의 애닲은 향수...... 그 나그네가 우리 고장에 봄가을이면 드나드는 <過客>들이거나 혹은 신라때부터 맥맥히 내려 오는 우리의 구슬픈 핏줄에 젖어흐르는 꿈이거나, 혹은 한평생을 건너가는 인생행로의 과객으로서 나자신이거나, 그것을 헤아리지 않았다.

다만, 생에 대한 가냘픈 꿈과 그 꿈조차 오하려 체념한, 바람같이 떠도는, 절망과 체념의 모습으로서 나그네가 내게는 너무나 애닲은 꿈(영상)이었다. 더구나 우리는 세상을 다 버리고 떠도는 자를 나그네라 부르는, 그 버리는 정신, 그것은 모든 소망을 잃은 자가 살 수 있는 유일한 <길>이었다.


<버리는 것>으로서 스스로를 충만하게 하는 그 허전한 심정과 그 심정이 꿈꾸는 애닲은 하늘, 그 달관의 세계---이런 뜻의 총화적(總和的)인 영상으로서 나그네를 꿈 꾸었을지 모른다.

그러나, 이것은 설명하기 위한 설명일지 모른다. 내가 <나그네>를 쓸 무렵에는 오히려 뜻릉 따져서가 아니다. 다만 막연하게 답답한 심령의 세계가, <나그네>로 말미암아 <울음>이라는 구원의 통로를 얻게 된 것이며, 통곡함으로써 얻는 후련한 위안을 이 작품에서 느꼈으리라 믿는다.


위에서 <나그네>의 주제적인 모티브가 <구름에 달 가듯이 가는 나그네>라 했다. 그러나, 사실은 구름 사이로 빠져나가는 그 맑은 달의 모습이라함이 정확하리라.

샛가만 구름장 사이로 달은 씻은 듯 말갛게 건너간다. 바람이라도 불어 구름이 빨리 흐르면 흐를 수록 날개가 돋친 듯 날아가는 달의 그 황홀한 정경. 그 달의 모습에서 나는 세상을 버린 자의 애달프게 맑은 정신을 느낀 것이다. 그러므로 <구름장 새로 흐르는 달>이 곧 나그네며, 나그네가 구름을 건너가는 달이있는 것이다.

이 체념과 달관의 세계에서 오히려 일말의 애수를 띄운 것을, <강나루를 건너, 퍼런 밀밭머리의 길>이나 혹은 <술이 익듯 저녁놀이 타는 마을>같은 향토적인 풍경 위에 수를 놓아 보려고 애를 썼다.


과연 그것이 어느 정도로 성공했는지 나 자신은 모르거니와, 어떠면 <나그네>는 내게 한편의 작품으로서가 아니라, <靑鹿集>에 수록한 작품들과 모조리 통하는, 그 무렵의 내 정신의 전우주(全宇宙)같은 느낌이다. 이것은 작품으로서의 좋고, 나쁜 것을 따지는 것이 아니다. <나그네>에 잠겨있는 세계가 그렇다는 뜻이다.


이 <나그네>에서 표현의 특이한 점은, <구름에 달 가듯이 가는 나그네><길은 외줄기 南道 三百里>혹은 <술 익는 마을마다 타는 저녁놀>등 구(句)마다 명사(名詞)로 끊은 점일 것이다. 그것은 <나그네>에서만 아니라, 나의 다른 작품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나대로의 독특한 표현 방법이다.


이것을 쉽게 설명하며는, 구(句)를 고정시키고, 구에 어린 정감량(情感量)을 확립시키기 위한 것이다.

가령,

 


구름에 달 가듯이

가는 나그네.



이 한 구로 예를 들면, 이 구의 실린 의미와 감동이 <가는 나그네>라는, 그 <<나그네>에 집중되는 것이다. 만일 <나그네가 가네>하면, <나그네가 가는 것>에 의미와 감동이실리게 되므로, <나그네>에 쏠리는 감동의 집중감이 희박해 지기 쉽다. 이렇게 句마다 끝에 主語를 놓고, 그것에 <意味와 感動의 악센트>를 쏠리게 함으로 句마다 감동의 집중감을 돋구게 한다. 또한



길은 외줄기

南道 三百里


술 익는 마을마다

타는 저녁놀



처럼 <길은········>하는 句를 <三百里>로써 끊어 그 句에 실렸는 정서가 다음 句로 유동하는 것을 막아, 고정화시키는 것이다. 이것은 <閏四月>에서도



松花가루 날리는

외딴 봉우리

.

윤사월 해길다

꾀꼬리 울면······



역시 첫구를 <봉우리>로 끊음으로써 다음구로, 의미나 감정이 번지는 것을 막는 것이다. 그래서 한구는, 구로서의 독자성을 강하게 하고, 구간의 여백을 절연(絶緣)시키는 것이다. 구간의 절연이 강하면 강할 수록, 그 절연을 넘어서 정서나 의미의 암시가 깔리게 되면 한결<省略의 餘韻>이 돌게 되는 것이다. 시의 구간에 깃드는 <생략의 여운>이야말로 시를 더욱 생기가 돌고 함축이 강하게 이루는 것이리라


또한 가락으로서도, 명사로 끊는 것이 보다 오묘한 것을 이룰 수 있는 것이다. <나그네>는 7 · 5조를 깨끗이 밟고 있다. 그럼에도 그 7 · 5조의 안이성을 만일 이 작품에서 느끼지 않는다면 그것은, 조사(助詞)를 달지 않는 명사로써 구(句)를 끊는 그 효과일 것이다.


<나그네>를 읊는 경우에 <강나루건너서 - 밀밭길을 - 구름에 달 가듯이 - 가는 나그네/길은 - 외줄기 南道 三百里 /술익는마을마다 - 타는저녁놀/구름에달가듯이 - 가는 나그네>하고, <건너서> <길은> <타는> <가듯이>등에서 길게 뽑아 이렇게 호흡을 느추더래도, <가는 나그네> <三百里> <저녁놀>에서는 완전히 호흡을 멈추었다가 새로 모아서 다음 구(句)를 시작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.


이렇게 호흡이 면면히 이어지지 않고, 句마다 다급하게 끊어지는 심한 호흡의 굴절이 句마다 정감을 모으게 하는 것이 아닐가. 그래서 작품이 가락에 쉽사리 유동 융합되는 출렁거리는 가락으로서 흘러버리게 되는 것이 아니라 <읊으면서 안으로 새겨지는 힘>이 깃드는 것이 아닐가. 그것은 이렇게 구절구절(句節句節)이 제대로 뚜렷이 살아나게 함으로 <가락에 맡겨 버려지는 것>을 거부하고, 그 의미나 회화적인 이메지를 한결 확립시키는 소임을 할 수 있는 또 하나 길이 될 것이리라.

실로<나그네>는 가락에 맡겨서 이룬 것만이 아니다. <구름에 달 가듯이>를 반복한 것은 음악적인 조화만을 위한 것이기 보다 한편의 작품에 <정감의 균형과 그 비중을 살펴서 구성상의 배치>에 유의한 것이리라.


그리고 <南道 三百里>라는 구의 <三百里>가 말썽이다. <南道 三百里>가 어디서 어디까지 냐고 묻는 이가 있기도 했다. 그러나 이 <三百里>는 원노오트에 <南道 八百里>로 되었던 것을 발표때 三百里로 고친 것이다. 이것은 <삼백리> 혹 <팔백리>하는 것이 문제가 아니다. 에이츠(W.B. Yeats)의 <이니스프리이>라는 작품 중에,

나는 일어나 바로 가리, 이니스프리이로 가리



외 엮고 흙을 발러 조그만 집을 얼어

아홉니랑 콩을 심고, 꿀벌은 한통

숲 가운데 비인 땅에 벌 잉잉거리는 곳

나 홀로 거기서 살으리



라는 구절이 있다. 이 경우에 <아홉니랑 콩을 심어>의 <아홉니랑>은 꼭이 아홉 개의 밭이랑이라는 뜻이 아니다. 평화로운 그 꿈의 섬에서 가난하게 충만히 살 수 있는 <가난한 충족을 꿈꾸는 그야말로 가난한 행복의 면적(面積)이다 다시 말하면 가난하게 행복된 감정이 실감하는 수량 - 그것이 아홉이랑이다. <나그네>에서 南道 三白里도, 내 서러운 정서가 감정으로써 받아드릴 수 있는 거리 - 그것이 三百里일 따름이다.


끝으로 이<나그네>를 내가 첨 썻을 무렵의 노오트를 그냥 초하면 다음과같다



나루를 건너서

외줄기 길을


구름에 달 가듯이

가는 나그네


길은 달빛 어린

南道 八百里


구비마다 여울이

우는 가람을


바람에 달 가듯이

가는 나그네



첫구는 설명이 지나친 것 같아 <밀밭 길>로, <달빛 어린 길>은 진부한 것 같아, 수정했고 <구비마다······>는, 芝薰의 <玩花衫>에서 화답시(和答詩>를 이루고, <바람에 달가듯이>는 이미<구름에 달 가듯이>와 중첩된 것 같아 고쳤다.


이렇게 작품에 손을 댈적마다 생각나는 것은, 추천을 받을 때, 그 선자(選者)가 한 말이다.

<옥에 티와 미인의 이마에 사마귀 한낱이야 버리기 아까운 점도 있겠으나, 서정시(抒情詩)에서 말 한 개 밉게 놓이는 것은 용서할 수 없다.> 

                                                                      - 보랏빛 素描 (朴木月)-에서





출처 : doridorihm
글쓴이 : 박이차 원글보기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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